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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코발트광산, 민간인 대량학살, 대구교도소, 폐광산, 3500명 처형, 유골이 묻힌 원한이 서린 폐광, 현장답사기

by Sneakers2022 2023.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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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에는 경산의 코발트광산(폐광)에 현장 답사를 다녀오게되었다. 시작은..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호러명소를 알아보다가 알게된 곳인데, 성격상 흥미 위주로 접근할 곳은 전혀 아닌 3,500명의 원혼이 서린 엄숙하고도 슬픈 역사의 한 장소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경산 코발트 광산 학살사건은 1950년대 7월~9월의 사이에 발생하였다. ( 위치는 경상북도 경산시 평산동 652번지 )
6.25 전쟁 기간중에 발생하였으며 유가족 추산 약 3,500명의 인명이 이 코발트 광산에서 억울하게 처형을 당하게 되었다. ( 이곳은 경산 안경 공장 학살사건으로 불리기도 한다. )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은 본 광산에서 코발트를 채굴하는등 수탈을 일삼다가 1945년 일제가 패망함에 따라서 폐쇄를 하게되어 폐광으로 남게되었다. 그런데 이 폐광에서 보도연맹 회원들을 학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뿐만 아니라 당시 대구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죄수들까지 합해서 도합 3,500명의 생명을 본 폐광에서 학살을 자행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학살을 자행한 주체들은 입을 열지 않고 있으며, 본 폐광에는 수천명의 뼈가 묻혀있기에 발골작업을 시행하기도 했다. ( 아래 사진 참조 )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발굴된 유골들

 
본 사건의 피해자는 대구 형무소 및 부산 형무소의 수감자들과 보도연맹의 회원들로 나뉜다. 이중 보도 연맹에 가입한 회원들은 무고한 농민들이 대부분이었으며 피해자 유족들은 이에 대해서 현재까지 원한과 분노과 한맺힌 삶을 살고 있다.
학살된 사람들은 대부분 20-30대의 젊은 남성들이라고 한다. 
 
* 어떠한 방법으로 학살을 자행했는가?
 
당시의 학살방법은 2-3명 단위로 사람들의 손과 발을 철사나 밧줄로 한데 묶은후 수직으로 50m 정도 되는 높이의 갱도 앞에 세워놓은후 낭떠러지로 밀어버리거나 갱도 쪽 사람에게 총살을 하는 방법으로 처형을 단행했다고 한다. 또한 규모가 작은 편인 제2수직굴이라는 공간에서는 사람들을 꾸겨넣은후 총으로 쏴 죽이는 방법도 자행되었다. 이러한 대량 학살이 자행된 이후 이 근방의 개울은 핏빛으로 물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후 1960년, 즉 사건발생 10년 후에야 유족들이 마음을 모아서 위령탑을 세우고 유족회를 결성했다고 한다. (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유족회를 반국가단체로 규정, 강제 해산을 시키는 것도 모자라 위령탑을 부수기도 했다고 한다. ) 

* 아픔과 한이 서린 역사적 현장, 공포체험장으로 인식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경산 코발트 광산의 대량 학살 사건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요즘 세대들이 이곳을 뼈가 발굴되는 공포 체험지로 오해하고 촬영을 해가는 일이 종종 있다고 한다. 이전에는 갱도를 완전히 폐쇄하지 않아서, 갱도문을 열고 들어가 불법 촬영을 하는 유튜버들도 많았다고 한다. 
당시 아무런 죄도 없이 처형된 수 많은 민간들의 한이 서려있는 경산 코발트 광산은 흥미로 접근할 장소가 아니며, 우리나라 역사의  아픈 진실을 보여주는 한이 맺힌 역사적 현장이다. 아직도 경산 코발트 광산의 갱도 부근에는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들이 컨테이너 박스에 유골을 보관하며 자신들의 잃어버린 가족들의 원혼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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